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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zz Musicians

델로니어스 몽크(Thelonious Monk)의 음악과 인생 (1)



많은 모던재즈 아티스트들이 과거의 요소들을 자신만의 번득이는 아이디어와 결합시켜 새로운 사운드를 창조하는 데 힘을 보탰다. 전통재즈의 한계를 확장하고 미래 실험을 위한 길을 닦았다. 이들 중 비밥혁명의 에너지와 전통주의자들의 스윙을 융합, 자신만의 독특한 블루스 스타일을 창조한 뮤지션이 있다. 델로니우스 몽크(Thelonious Monk)이다.

델로니우스 스피어 몽크(Thelonious Sphere Monk)는 1917년 10월 10일 노스캐롤라이나의 록키마운트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뉴욕으로 이사해 10살이 되기 전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몽크는 기존의 음악스타일을 답습하기 보다는 자신만의 논리와 규칙과 끼로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로컬 밴드에서 연주하면서 그의 스타일은 꾸준히 진화했다. 하지만, 당시의 피아니스트들과 구별되는 특이한 연주스타일때문에 일정한 일을 갖기가 어려웠다. 그의 음악스타일은 다른 뮤지션들에게는 이상하고 혼란스러운 것으로 여겨지곤 했다.

피츠버그 출신의 드러머인 케니 클락(Kenny Clarke)을 만나면서 몽크는 함께 뉴욕 민튼스 플레이하우스(Minton’s Playhouse) 하우스밴드의 일원이 되었다. 정규시간에는 스탠다드를 연주하는 한편, 늦은 밤이 되면 좀더 흥미로운 잼 연주가 펼쳐지곤 했다.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 찰리 파커(Charlie Parker), 버드 파웰(Bud Powell) 등 재즈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다른 젊은 진취적 연주자들을 만난 것이 이 즈음이다.

민튼스 플레이하우스를 떠난 후에는 럭키 밀린더(Lucky Millinder), 쿠티 윌리엄스(Cootie Williams) 등과 일했다. 이 밴드의 사이드맨으로서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 콜맨 호킨스(Coleman Hawkins)와의 만남은 도약의 기회가 되었다. 1944년 몽크는 콜맨 호킨스 쿼텟(Coleman Hawkins Quartet)과 함께 레코딩 데뷔를 했다. 콜맨 호킨스는 몽크의 음악을 지지하는 몇 안되는 음악인 중 하나였다. 이 앨범을 통해 몽크는 천재적인 연주실력을 드러냈다.

하지만,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간 탓일까, 그의 연주는 대중들의 박수를 받지 못했다. 비평가들과 애호가들에게 외면받은 그의 창의적인 작품들은 앞으로 있을 하드밥, 프리재즈 운동의 전조가 되었다. 이후 몇년 동안, 그는 녹음과 라이브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같이 일하기 힘든 스타일로 딱지 붙은 그를 이해해 줄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그는 먹고 살기 위해 음악 이외의 다른 일을 해야 했다.

그에게 심기일전의 계기가 된 해는 1955년이다. 리버사이드 레이블과 계약하고 ‘Thelonious Monk plays the Music of Duke Ellington’을 녹음, 발표했는데 비평가나 애호가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끌어냈다. 이 즈음, 그의 음악스타일은 예전에 비해 그렇게 난해하지 않았다. 이제는 재즈음악계에 자신 만의 스타일을 기대하는 풍조가 조성됐다. 몽크가 계속해서 따라왔던 공식이다. 독특한 사운드로 비아냥받던 몽크가 갑자기 독창성으로 칭송받는 아티스트가 되었다.

(2편에서 계속)